• 북마크
image

지조의 정치인 라용균

민정당이 내세운 후보로 무난히 부의장에 당선된 백봉 라용균의원은 지난번 선거에 정계의 거물급인사가 거개(擧皆) 지역구를 포기하거나 낙선의 고배를 마 셨지만 출생지 정읍에서 당당히 당선되어 노장의 관록을 다시 한 번 과시하였 다.

사실 우리 나라 거물정치인중에서 정치적 과오를 범하지 않고 꾸준히 지조 를 지켜온 사람이 몇 사람되지 않으며, 더구나 라부의장 같이 항일독립운동때 부터 투신한 현역정치인은 이제 불과 몇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다. 누구에 못지 않은 해박한 정치적 식견과 풍부한 교양을 지닌 온건온화한 노신사로서 존경을 받고있는 라용균 의원은 야당출신이기 때문에 비록 부의장자리를 차지하였지 만 긴박한 현정국에 비추어 앞으로 그가 가진바 지도적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 하여 정국의 안정과 민생문제해결에 크게 기여할 것이 기대된다.

국운이 이미 기울어져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가렴주구에 시달리다 못한 민중의 봉기로 민심이 흉흉하고 밖으로는 한반도를 넘나보는 청일노열국의 각축이 한 창이던 풍운급한 한말 1895년에 동학란의 발상지 정읍에 태어난 라부의장은 소 년시절에 벌써 부정부패를 미워하고 이에 항거하는 저항의식을 품게 되었다.

라부의장의 향제(鄕第)는 전봉준이 살던 현 정의군 이평면 오소리와 지호지간 의 가까운 이웃이며, 전봉준은 라부의장의 선조와 같이 라씨댁(羅氏宅) 서당에 서 공부하였으며, 라부의장의 조부는 전봉준의 비범함을 알고 그를 사랑하였으 며, 전봉준 역시 그를 존경하였던 고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을 뿐 아니라 관의 토 색(討索)질에 잘 응하지 않는 부호 라씨댁을 미워하는 관군은 동학군이 황토현 에서 대첩(大捷)하기에 앞서 백산(현 부안군)에서 짐짓 패한 체 하고 황산현에 다 진을 치자 이를 뒤쫓아가면서 쳐들어가, 라부의장의 선친은 칼을 가슴에 맞 았으나 옷 위였기 때문에 부상에 그쳤으며 난후 그의 조부는 동학에 내응하였 다는 혐의로 전라감영에 붙들려가 가진 악형을 당하고 서울까지 압송되었으나 백방으로 주선하여 화를 면했었다.

이러한 관계로 라부의장의 조부나 선조는 그가 어렸을 때 늘 전봉준과 동학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므로, 제폭구민(除暴救民)의 깃발을 들고 싸워 그 고을 사 람들의 영웅이었던 전봉준은 소년 라용균의 어린 마음에 크나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가 성장하여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야당의 중진 으로 줄기찬 대여투쟁을 전개하여 항시 국민의 편에 서서 싸워온 것은 결코 우 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라부의장은 현재 갑오혁명기념사업협회 이사장임) 이미 다 아는 일이지만 라부의장은 삼일운동시절 동경 조도전대학재학중 재 동경 한국유학생독립선언사건(2.8독립선언)으로 일경에게 체포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자 상해로 망명하여 약관 24세의 몸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였 지만 그는 그때부터 독립정신에만 불타있었을 뿐 아니라 확고한 정치적 신념 의 소유자였다.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원동혁명자대 회에 김규식, 여운형씨와 같이 대표로 갔던 때의 일이다. 영하 70도의 강한(强寒)을 무 릅쓰고 몽고사막 시베리아벌판을 건너서 모 스크바에 도착한 즉, 난데없이 한국의 3.1운 동은 공산주의자의 주동과 민중의 호응으로 일어났고, 앞으로 한국의 독립도 공산혁명으 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선언문에 서명을 강요당했는데, 그는 세차례나 러시아 관헌의 총살장에 끌려가 집행 직전의 아슬아슬 한 위협을 당했지만 대표의 수임사항이 아니고 사실과 어긋난다고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였다 한다. 한편 김규식, 여운형 양씨는 이를 거부치 못하여 상해에 귀국 후 동지들의 많은 추궁을 당했다.

하지만, 죽음 앞에 당하여 목숨을 초개와 같이 알고 애국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라 부의장의 청년시절의 기상을 이 한가지만으로도 능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애국적 신념에 불타는 청년 라용균에게 영국유학의 기회는 그의 인격을 도야해 주고 학문을 완성시켜 오늘날 그를 조국 의 정치지도자가 되게 할 탁월한 식견과 고결한 인격과 민주주의적 양식을 부여하였다.

그는 면학을 계속할 의욕에 불타 1923년에 도영하여 세계에서 정치학의 최고학부라 일컬음을 듣는 런던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 난 뒤 세계를 일주하여 견문을 넓히 고 민주주의 국가사회의 생활양식을 몸소 체득하고 귀국하여 가진 유혹과 모진 압박과 탄압을 물리치고 농원생활을 계속하였는데, 그가 해방과 동시에 동지들과 더불어 한국민주당을 조직하여 동당 사무국장, 제헌국회 내무치안위원장, 급경제 원조요청 미국사절, 민주국민당 정책위원장, 4,5대 민의원, 보건 사회부장관 ,민정당 최고위원을 역임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신조를 굽힘이 없이 때로는 지나치게 강경한 일면이 있으면서도 한편 춘풍화기와 같이 온화한 맛을 풍기는 전형적인 민주주의적 신사로서 타의 존경을 받는 소이도 실로 그가 걸어온 이와 같은 역정의 결정일 것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의 너무도 신사적이고 온건한 민주주의적 활동양식은 때로는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인기전술이 판을 치는 이 나라 정치풍토에는 알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신념에 어긋나는 현실과 타협할 줄 모르며 자신의 명리를 위하여 소절(小節)에 굽힐 줄 모른 다. 오직 그가 믿는바 무엇이 애국이고 무엇이 옳은가의 그의 양식에 입각한 판단에 따라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일해나갈 따름이다.

그러므로 정계에서는 그를 존경할만한 신사로 대접하지만 반면에 그가 걸어온 발자취와 지닌 역량에 비추어 상응한 보다 화려한 정치적 지위에 진작 올라서지 못한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모든것을 그는 개의치 않고 한발자국 한발자국 오직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기신념대로 걸어갈 뿐이다. 때는 바야흐로 도래하였다. 현하 조국은 정국이 불안하고 경제위기가 겹쳐 위정자들의 지도역량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이때에 칠십 평생을 오로지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하여 바쳐온 참다운 정치가다운 정치가 라용균 부의장이 그의 가진바 역량을 이번에야 말로 아낌없이 바쳐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를 바랄 뿐이다.


*1964년 6월 5일 6대 국회 프로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