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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각자 라용균

야당의원으로 부의장 일석을 차지하고 있는 라부의장은출생지전북정읍에서출마하여,공화당공천후보를 물리치고 당당히 당선되어노장의 관록을과시하였다.
이는과거의그의독립투쟁을위한경력으로보아당연한귀결이라하겠다.삼일운동당시라부의장은일본조도전대학재학중이었으며,그때재동경한국유학생독립선언사건(2.8독립선언)으로왜경에게체포투옥되었던일이있다.
그후해방되자중국상해로망명하여약관24세의몸으로임시의정원의원으로활약한바있으며,어릴때부터독립정신에불타는확고한정치적신념의소유자였다.1922년에소련모스크바에서열린원동혁명자대회에대표로갔던때의일이다.그때그는거기한국의독립도공산혁명으로성취되어야한다는취지의 선언문에 서명을 강요당하였지만, 온갖 위협을 무릅쓰고 이것은 대표의수임사항이아니고사실과는어긋난다고하여끝까지거부하였다는라씨의우국충정은그기상의일면을보여주는사건으로서유명한이야기이다.

이와같은불사의청년망명정객인그에게도영국유학이마련되어그의인격도야와학문완성에좋은기회가되고,오늘날그를조국의정치지도자가되게한터전이 된 셈이다. 그는 1923년에 도영하여 런던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하고,그후구주와미주등세계각국을순방하면서한국자유독립에협조해줄것을요청하였다.
귀국 후 일제의 갖은 유혹과 협박을 물리치고 고향에서 조용히 농원생활을 계속하다가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조국광복을 본 그는 동지들을 규합하여한국민주당을조직하고동당사무국장이되었으며,5.10선거시출마하여제헌국회의원에당선되어제헌국회내무치안위원장직을지냈다.

1950년에는국회사절로 도미하였으며, 그 후 민주국민당 정책위원장, 제4,5대 민의원, 보건사회부장관등을지내면서정치관록을쌓았다.구국투쟁에일관해온지조있는전형적인민주주의적신사인그는현재국회부의장과민정당최고위원으로서타의존경을받으며정치적신조를굽힐줄모르는정치가이다. 특히그가보여준외교적수완은 능란하며, 그 실례로서 지난번의 IPU 한국가입에 있어서 여러 회원국을 순방하여대한민국국회가정당한국회라는것을설득하여,마침내는북한가입신청을부결케하고대한민국만이정식으로가입이되도록하였다.이어그는총회에서부의장에선출된바도있다. 천주교를신봉하는라씨는부인박귀례여사와의사이에칠남매를슬하에둔다복한자부이다.격무의틈을타서민정시찰을잊지않으며늘국민속에국민과더불어호흡하는정치인이고국가와민족을위하여자기신념대로걸어갈뿐이다.
1965년 3월 25일 6대 국회의원 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