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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 라용균

우리나라정치사를돌아보면대개타협과화합보다는갈등과반목이먼저떠오른다. 최근 여야(與野)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행태만 보아도 독선과 아집, 그리고 상대의 발목잡기가 일상화되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국민의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를 수렴·조정해, 국민을 편안케 해야 할 정치권이 오히려국민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상대의 주장을 존중하면서도탁월한리더십을발휘할수있는대인풍모의정치,국민들은그러한정치에 목말라 있는지도 모른다. 백봉(白峰) 라용균(羅容均). 그는 이러한 때일수록떠오르는 인물이다. 해방 전에는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에는 야당지도자로 민주화를위해싸웠던선각자.금도(襟度)를지닌정치인.항상웃음을잃지않는 전형적인신사(紳士).라용균은이같은인물로현대한국정치사에녹녹치않은발자취를남겼다.

라용균은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1895년 11월 정읍군 영원면 운학리(현 정읍시영원면운학동)에서나도진의아들로태어났다.그의집은근동일대에널리알려진부호였다.그리고그의집과가까운이웃(이평면조소리)에동학혁명의횃불을높이든전봉준(全琫準)이살고있었다.전봉준은라(羅)씨댁서당에서공부했으며, 라용균의 할아버지 라정집(羅正集)은 그의 비범함을 알고 총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동학혁명이 끝나자 라정집은 동학에 내응(內應)했다는혐의로전라감영에붙들려가곤욕을치러야했다.이러한분위기에서자란라용균이커서독립투쟁과민주화운동에 나선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소년시절 완고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는 19살 나던 1914년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동경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수학하던중1919년「2.8독립선언」에주도적으로참여했다.3.1운동의기폭제가된2.8 선언은 한국인의 민족혼을 동경 한복판에서 떨친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날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 대강당에는 조선인 유학생 3백여명이운집했다.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白寬洙)가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장내는아수라장이되어버렸다.경시청순사들이들이닥쳐주모자급12-13명을간다(神田)경찰서까지 연행했다. 라용균도 구금 투옥되었다. 그는 당시 운동자금 의대부분을대었고감방에서고문을당하기도했다.

라용균은 1919년 7월, 출옥하자마자 바로 중국 상해로 망명길을 떠났다. 상해에서는마침임시정부의정원회의가열렸고다른2명과함께전라도대표로선출되었다.당시그의나이24살이었다.이에앞서4월13일상해프랑스조계에서는 이동녕의 주도로 상해,국내,노령(露領)등 각 지방의 대표자 29명이 모여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여 민주 공화제를 표명하면서임시정부를구성했다.국무총리에이승만,내무총장에안창호,외무총장에김규식등이각각임명되었다.

이정식(李庭植)교수(美펜실베니아大)가1969년박권상씨와함께라용균을만난대담록에따르면그는1921년소련모스크바에서열린원동(遠東)혁명자대회에김규식,여운형과함께참석한것으로되어있다.일명동방(東方)피압박자대회라불린이대회는워싱턴에서열린태평양회의에대항하기위해레닌이소집한것이다.우리대표들은소련이약소민족을도와주겠다고해서그들의원조를끌어내기위해참석했다.여기서라k용균은한국의독립도공산혁명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취지의 선언문에 서명을 강요당하였지만 온갖 위협을 무릅쓰고이것은대표의수임사항이아니고사실과도어긋난다하여끝내거절했다.혁명자대회에참석한후다시상해로돌아온그는북경과상해를오가며내분에휩싸인독립운동 진영의 단합에 부심했다. 당시 독립운동은 지역별 인물별 이념별로 나눠져 그 정돈이시급한과제였다.이를극복하기위해1922년상해에서국민대표회의가열렸고그는준비위원으로 선임 되었다. 위원장에는 남형우, 회계에 김철, 원세훈, 서기에 라용균, 서병이 각각뽑혔다.이처럼독립운동에매진하던라용균은1923년미국과유럽중심으로돌아가는세계정세를더욱익히기위해영국유학을결심하였다.
배를타고런던에도착한그는처음옥스포드대학에들어갔으나학비가너무비싸런던대학으로옮겼다.당시런던대학에는라스키교수등정치경제분야에탁월한교수들이많이모여 있었다. 그는 영국에서 7년을 체류했다. 이 기간이 그에게는 신사서의 품성을 닦는계기가된것으로짐작된다.



영국유학을마친그는1930년한국으로돌아왔다.그동안고국에서는그의부친이일제에의해18번가택수색을당하는등자식의뒷바라지로많은수모를겪어야했다.귀국후일제의갖은유혹과협박을물리치고시골집에서조용히농원생활을하였다.하지만토지개량사업을 해보라는 일본인 친구의 권유로 한때 전남에서 간척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해방 당시3천석을추수할정도였다고한다.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라용균은 동지를 규합, 한국민주당을 결성하고 사무국장에 선임되어 정치활동을 벌였다. 1948년 치러진 5·10 선거에 정읍(甲구)에서 출마, 무투표로 제헌의원에 당선 되었으며 국회 내무치안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미국 의회에서 대한(對韓)원조안이부결되자신익희국회의장과함께국회대표로미국에건너가원조안의부활에진력,결국 교섭에 성공하였다. 같은 해 민주국민당 대회에서 의장에, 1954년 민주국민당 정책위 원장에선출되었다.1958년에는고향에서다시4대국회의원에당선되고,같은해UN총회대표로뽑혀활발한외교활동을벌였다.
1960년에는5대총선에서초대민의원에당선되고민주당정권에서보건사회부장관을역임하였다. 1961년에는 가족계획협회를 조직, 초대회장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을잡은민주당은국민적기대와4·19혁명정신을저버리고실권을장악하기위한신구파(新舊派)의 고질적인 싸움으로 치달았다. 민주당의 양대세력은 흔히 신파와 구파로 구분되었다.1955년사사오입개헌이후민국당이반(反)이승만세력을모아민주당으로출발하는과정에서한민당-민국당에뿌리를두고있는수구파(구파)와자유당정권에반기를들고새로야당대열에합류한신진세력(신파)이한지붕아래모인것이다.추종하는인물의이름을따서조병옥파(구파)와장면파(신파)라고도불렸다.

신파와 구파의 대립은 1956년 정·부통령 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표출되기 시작해 1960년대통령선거 후보 선출과정에서 더욱 심 화 되 었 다 . 결국 1961년 2월 집권 민주당과 신민당으로 갈라섰다. 이같은 과정에서 라용균은 신구파의 화합에 앞장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분열은5·16쿠데타를불러들였다.그는1963년민정당을조직,최고위원에피선되었으며 6대 총선에서 당선돼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을 맡았다.1964년에는 국회에 국제의원연맹지부를설치하고부의장에선출되었으며코펜하겐에서열린국제의원연맹대회에참가, 대회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1966년에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의원 연맹대회에서운영위원장에피선되었다.
이후 1979년 광복회와 독립동지회고문, 1980년 제헌동지회 의장을 역임하였다. 1977년에는독립유공자로건국포장을받았다.1986년91살로작고,사회장으로치러졌으며국립묘지에안장되었다.

전북일보 선정“20세기 전북인물 50인”(1999년)
출처: www.jeonbukilbo.co.kr/GIHACK/ man50/man_27a.html